그대의 아름다운 평화
-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ハウルの動く城, Howl's Moving Castle> 리뷰-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엔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 무색하게도 전쟁과 인간에 대한 회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역설하는 등의 정치성이 깔려있었으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제작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을 하울과 같은 처지에 놓고서 작품을 만들었다" 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하울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의
곁에 있는 소피를 살펴보게 되면 이 작품이 무엇을 그려내고 있는지 또다른
방향으로 실마리가 잡힌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개봉했을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드물게 마법사와 소녀의 '로맨스'를 그려냈을 거라 예상하고 극장에 들어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첫 장면은 전투기와 전함의 요란한 행렬에 환호하는,
즉 '전쟁'에 무감각한 도시와 군중들의 모습이었고 반면에 소피와 하울이 처음 만나는
곳은 그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작은 골목의 모퉁이다.
나이 먹는 건 슬픈 일이 아니랍니다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소피가 황무지 마녀로 인해 늙게되는 것이 '저주' 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려던 관객의 통념을 뒤집어 버리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소피는
난데없이 90살로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에 크게 충격을 받고, 18살의 본모습을 되찾아
일상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하울의 성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곧
거울을 보며 "나름대로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았으며, 여행 도중에는 "나이가 드니 잔꾀만
늘어나네." 라고 중얼거린다. '저주'가 무색하게도, 할머니로 변하고 나서 오히려 더 밝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해버리는 건 이 뿐만이 아니다. 하울을 만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소피는 자신에게 추근덕대는 군인들 앞에서 위축될 정도로 숫기 없던 소녀였지만, 하울과
마르클에게는 자신이 이제부터 청소부로 일할 거라며 능청스럽게 이야기하고, 하울 말만 듣던
캘시퍼까지 구워삶으며, 네 개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겁도 없이 이리저리 열어보며
신기해한다.
이때 더 인상적인 점은 소피의 성격 변화 이후의 행동들이다. 소피는
황무지 마녀의 저주 때문에 하울을 만나고 나서도 당장 자신이 진짜로 누구인지
말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빨리 마법이 풀려야 한다는 식으로 하울을 닦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팔을 걷어붙여 어질러진 하울의 성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며 하울과 마르클을
돌보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성에 들어온 소피는 하울, 마르클, 캘시퍼와는 달리 마법
능력도 전혀 없는 인간 중에서도 힘이 달리는 노인에 속하지만, 소피로부터 우러나는
'보살핌의 미덕'은 어느새 소피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만든다.
소피 나도, 마르클. 괜찮아, 안 갈거야.
마르클 정말? 우린 가족이지?
소피 그럼, 가족이지.
물론 소피 스스로 늙는 것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던 면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에게 저주를 내렸던, 한 때 '적'이던 존재였음에도 소피는 황무지 마녀 뿐 아니라, 설리만의 강아지(힌)까지 모두 포용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따지지 않고 단지 도움이 필요한 '생명'이기 때문에 보살피는 모성애는 소피가 설리만의 앞에서도 당당해 질 수 있는 힘이자, 모든 '적'을 일단 파괴하고 보는 전쟁의 본질과는 정반대편에 서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하울의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소피는, (국가의 강요를 거부하고) 전쟁에 나가지 않는 하울이 틀리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전쟁을
구원하는 에코페미니즘
이런 소피를
성에 살게하며, 정신적으로 의지하게되고 마침내는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하울이다. 소피
말대로 하울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며 뛰어난 능력까지 있는 마법사이지만 그 역시
원치않더라도 죽기 아니면 죽이기 뿐인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징집대상이다. 하지만 설리만을
피하기 위해 살게 된 성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공간은 어린 시절 꿈꾸던
꽃향기 가득한 들판이 아니라 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무지이며, 하울에 대해 '악마'라며 이런
저런 무서운 소문들을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정작 성 주위의 땅에는 가까이
와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울이 소피에게 "나는 겁쟁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하울이 전쟁을 마냥 외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의 편을 떠나서 전쟁을
그치게 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몸 여기저기를 다친 채로 성에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나 전쟁에 반대하는 하울 역시 그 전쟁 속에
날아들어 자신이 가진 마법, 즉 무력으로 '공격' 해야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한 채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폭력을 막아야 하는 모순에 부딪히는
하울을 "언제나 유성을 잡는 사람, 마음은 울고있는 남자" 라고 정의내린 것은
비단 황무지 마녀 뿐 아니라, 하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런데, 악마에게 심장까지 넘겨가며 자유를 좇던 하울은 소피를 만나면서
비로소 지켜내야 할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하울처럼 전쟁에 나가야 하는
처지가 아니면서도 소피는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거의 본능적으로 전쟁에 대해서
만큼은 거부감을 느끼고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무서워하는 민간인이지만, (반면에 거리의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뉴스거리 내지는 구경거리로 여길 뿐이다.) 고통스러워하는 마법사 하울에게 "당신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다." 고 당차게 말하는 용기를 가졌다. 결국 하울이 잃어버렸던
심장을 되찾아주고 결과적으로는 (순무 허수아비로 변해버렸던 이웃나라 왕자를 통해) 전쟁마저 그치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런 마법도 가지지 못했지만 바른 가치관을 실천에 옮기는
평범한 여성인 소피다. 그녀는 하울에게 빨리 심장을 돌려줘야 하는 긴박한 순간에도,
철부지마냥 생떼를 쓰는 마녀에게서 심장을 나꿔채거나 윽박질러 빼앗지 않는다. 끝까지 '평화적으로'
달래서 스스로 내놓게 만드는 소피의 모습이 하야오가 생각하는 "지혜로움('소피 Sophie' 라는
이름의 어원)"을 지닌 여성의 실천일까.
소피 도망가. 싸우면 안돼.
하울 왜지? 나는 지금껏 도망쳐왔어.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생겼어. 너야!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구원자로서의 여성상이 드물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는 문명의 멸망을 한 차례
겪었음에도 여전히 자연을 정복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구원하기
위해 나우시카가 있었으며, 오히려 전쟁을 위해 무력까지 갖춘 '국가'와 달리 나라의
이름도 없는 그냥 '바람계곡'의 부락민들이 훨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반면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서는 국가와 전쟁, 그에 동원되는 국민이 전면에 등장하며, 설리만
앞에서 왕으로 변장했던 하울은 기어이 "왕궁은 설리만의 힘으로 폭격을 맞지 않지만,
다른 마을에 폭탄이 떨어지게 된다." 라 말하면서 무고한 민중만 죽어가는 전쟁의
현재성을 고발한다. 그리고 자신을 겁쟁이로 생각했던 그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은 채, 전쟁 그 자체를 막기 위해 날기 시작한다. 소피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전쟁을 방해했다면 (그는 그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젠킨스나 펜드라곤같은 가명을 썼다고 소피에게 털어놓았었다.), 이제는 소피와 함께
이루어가는 평화로운 삶,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하울은 폭격과 화염에 휩싸인 하늘로
기꺼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행복한 호모 폴리티쿠스, 미야자키 하야오

소피와 하울은 외면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 잃었을 지 몰라도, 젊음의 순수함과 노년의 여유로움, 지혜를 모두 경험했다. 전쟁이 끝나고, 정말로 자유로워진 하울과 소피는 여전히 마르클과 힌, 마녀를 돌보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성은 더이상 황무지도, 새까만 어둠에도 머무를 필요 없이 '전쟁 없는 세상' 속에서 눈부신 하늘을 날아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동안 선(善)을 대표하는 캐릭터를 강직하면서도 역동적인 소녀의 이미지로 구현해왔으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나이든 여성의 지혜로움으로부터 발견해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에서 인간이나 세상 뿐 아니라 '하울'에 빗댄 스스로의 인생 역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따위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 이라고 비웃던 <붉은 돼지(1992)>를 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당시 한창이던 이라크 전쟁과 징병제에 대한 은유가 곳곳에 깔려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을 부정하는 우리들이 어떤 가치를 지켜내며 살아가야 하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며 통찰하게 된 여유와 지혜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에게 할머니나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젊은 관객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수 있다면 창작자로서 더 바랄 게 있을까.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를 작품 안에 진솔하게 녹여낸 감독이라는 점에서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부러웠다. 하울과 소피가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 입을 맞추는 마지막 장면이, 꼭 "이런 시간들을 거쳐온 나는 행복하다." 고 말하는 노년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07년 8월 21일~22일 네이버 '감성지수 36.5' 코너에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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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스페이스가 네이버에 있던 시절, 이 글이 네이버 메인에 소개된 이후 2008년 6월 11일까지 총 427개의 댓글이 달렸었습니다. 그런데 블로그 포스트들을 백업해서 옮기는 도중, 댓글이 100개까지밖에 옮겨지지 않는 오류가 났네요. 그래서 101번째 댓글부터는 어쩔 수 없이 네이버 기록을 복사해서 제 아이디(dajung)로 붙여넣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