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술상을 박차다
-'여성에게 술따르기를 강요하는' 시대유감 -
"누나, 어제 기사 봤어?
법원에서 "교장에게 술을 따르라고 여교사에게 권한 것은 '성희롱'이 아니다" 라고 판결한 거 말이야. 근데 인터넷에 보니까 사람들 의견이 분분하더라구. 아버지뻘 되는 교장선생님이 이상한 생각으로 술 한 번 따라보라고 한 것도 아닐텐데 뭘 그러느냐, 그렇게 사회생활에 일일이 태클 걸어서 쓰겠냐 뭐 이런 말도 봤어. 근데 또 누가 그러더라구.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 등등의 가족에게만 술을 따르는 법이라나?
내 생각? 글쎄. 사실 아직 결정을 못 내려서 누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어른들 술자리에서 여자들 몸을 막 만진다든가, 성적인 농담을 해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게 성희롱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이번 경우에는 좀 애매모호한 느낌이 들어서. 그럼 여자들한테 남자들이 술 따라달라고 함부로 부탁하면 안되는거야?"
안녕! 네가 이렇게 물어 본
게 5월 말인데, 누나가 다른 일로 너무 바빠서 글로 대신한 답변을
주겠다는 약속을 이제서야 지키게 됐구나. 너한테, 그리고 다정스페이스의 업데이트를 기다려주셨을 독자분들께(비록
몇몇일지라도)정말 죄송스럽다. 자, 아무튼 그럼 미뤄둔 얘기를 해볼까.
먼저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만나서 가볍게 한 잔 하고 회포를 푸는 술자리에서 남자든 여자든 누가 술을 따라주든 크게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사회생활 하면서 이성에게 술 한 번 안 따라줘보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 예전 고등학교 남자 동창이라든가, 회사 남자 동료라든가 만나서 주거니 받거니 술 한잔씩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뭐.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 사건에서의 술자리는,
우리가 으레 떠올리는 '평등한 술잔' 이 오가는 곳이 아니란다. 아버지 뻘
되는 선생님이 변태라도 되는 양 몰아세운 것 같니? 자, 그럼 다시
고쳐보자. 왜 '젊은 여성 부하직원' 이 '나이 든 남성 상관' 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 걸까? 분명히 그랬대. '교감선생님' 께서 '여교사' 들에게 두
번씩이나 '어서 교장선생님께 술을 따라드려라' 고 말이야. 이건 결국 한국의 마초적인
음주문화가 사내로까지 침투한 것에 다르지 않단다.
여성이 술을 '따라드리는' 사회
너희들 나이때에, 몰래 나이트클럽 가 볼 궁리는 해도 '룸싸롱' 에 발들여
놓을 생각은 별로 못하게 되지? 양주 값이 너무 비싸니까, 그런데는 보통
직장 남성들이 2,3차로 가잖아. 난 저 사건을 들었을??, 시가지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네온사인을 번쩍이는 수많은 '룸싸롱' 과, 그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텔들이 떠올랐어.
대한민국은 정말 남성의 (性) 이 방탕하도록 보장된 사회이지. 너도 대충은 알지? 저런 '룸' 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왜 술자리에 '아가씨' 들이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기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가씨' 가 시중든다는 것을 결국 그 '값' 을 지불하는 남성이 그 아가씨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용인받는 것이지. 몸 여기저기 만져보고 더듬어 보는 건 예사이고, 맘 먹으면 '룸' 에서 가까운 모텔로 가서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어. 성매매특별법 이후에는 오히려 이런 음성적인 성매매 패턴이 더 늘었대. 비단 룸싸롱 뿐인가. 아니 노래방에서 자기 혼자 노래도 못 불러, 왜 '여성 도우미 아가씨' 가 필요한거야? '나이 지긋하며 돈 있는 남성들' 과 그 '술자리에서 끼고 노는 젊은 여성' 들의 모습, 뭐가 생각나니? 그래. 기생 역할이지. 군데군데 여성차별적 요소가 남아 힘겨운 지금보다도 훨씬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미천했던 그 시대, 술 따르고 노리개가 되어 수청도 드는 그 기생 역할과 룸의 호스티스 역할이 뭐가 다르겠니.
내가 웬일로 호스티스들을 질타하냐고? 아니, 성매매여성들의 실상을 알고 나면 그들에게 '천박하다' 는 비난을 함부로 할 수 없어. (이에 대해서는 지난 번에 쓴 글을 참고해주길.) 오히려 나는 '창녀' 와 '술집여자'를 비하하면서도 그녀들을 이용할 건 다 이용해먹는 이 이중적이고 마초적인 술자리 문화에 분노하는 거야. 우리 사회의 여성노동인구 중 유난히 3차 산업의 비중이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봐.
여성은 기생이 아니라 동등한 사회구성원이다
이런 음주
문화, 회식 문화가 만연하던 한국의회사들에, 90년대 중반부터 '미씨족' 들을 필두로 결혼
후에도 퇴직하지 않는 여성의 수가 조금씩 늘어났으며, 여전히 여성의 취업은 남성에
비해 불리하지만 어쨌든 여성경제활동 인구는 늘어났지. 그런데, 이렇게 신규 진입한 여성에
비해 아직도 대부분의 직장 상사는 남성이지(물론 온갖 '유리천장' 덕분에 여성의 승진이
힘겨운 것도 있고).
그런데 이 아버지뻘되시는 직장상사들이 어떻게 대하니. 이들이 회식자리에서 부하여직원에게 술 좀 따르라고 '강권' 할 때, 저런 마초적 음주문화를 당연히 한번쯤-또는 자주 경험해 봤을 그들이 왜 젊은 여직원에게 '거 술 좀 따라봐요, 여자가 나긋나긋한 맛이 있어야지, 요즘 뭐 남녀평등이다 그러는데 남자건 여자건 드세면 못 쓰는 법이예요. 특히 여자는 더 그렇지 않나 말이야'고 말하겠니.
알아. 아닌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젊은 여교사와 나이든 남성 교장이라면, 교장선생님과 술잔을 나누면서 학생들 지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업무상 고충은 없는지 뭐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하는 '멘토링(mentoring)' 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그런데 이 사건은 그게 아니잖아. '답례로 술을 따라드리라' 는 정당한 권유가 아니야. 피해자 여성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니야.
#장면 : 2002년 9월 경북 안동 모 초등학교 3학년 교사 전체회식자리
2002년 9월, 여교사 최아무개(31)씨는 당시 3학년 김아무개 부장교사의 초청으로 류아무개 교장과 김아무개 신임 교감 등 9명과 함께 교사 전체회식에 참석했다. 이때 남교사들이 먼저 교장에게 술을 따랐고, 교장도 참석한 여교사 3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나 회식이 진행되면서 여교사들은 승용차를 운전하고 집에 돌아갈 생각에 교장이 따라준 술잔을 비우지 않고 있었다. 이를 본 교감은 "여선생님들, 잔을 비우고 교장 선생님께 한잔씩 따라드리세요"라고 말했으나, 여교사들은 그 말을 듣고도 자신들의 잔을 비우지 않았고 교장에게도 술을 권하지 않다.
이후 남교사들끼리만 술잔을 주고받았고, 또다시 교감이 여교사에게 "여선생님들, 빨리 잔들 비우고 교장 선생님께 한잔 따라드리지 않고…"라면서 재차 말했다.
그 말에 여교사 최씨는 '술따르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히려고 상위에 비우지 않고 놓아뒀던 술잔을 비우고 상아래 내려놓고, 이외에 다른 두 여교사들은 결국 교장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최 여교사는 회식 중에 교감이 자신을 지목해서 "교장에게 필히 술을 따르지"라고 말했던 것에 속상해했고, 이런 내용을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에 "교감의 술따르기 강요에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면서 시정신청을 내게 된다.
이에 대해 여성부 남녀차별위원회는 지난해 4월 교감이 여교사 최씨에게 유독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언행을 한 것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결정했으나, 1심 재판부는 성희롱 결정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오마이뉴스 5월 29일 기사 "여자가 술 따르는 게 아직도 미풍양속인가?" -
처음에 네 생각에는, 이 여선생님이 별 뜻
없는 권유를 쓸데없이 확대해석 한 거 같았겠구나. 물론 내 저 자리에
없었고, 아주 세세한 사실관계는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사례는 한국의
음주문화속 여성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는 있지.
법원이 26일 회식자리에서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라'고 권한 교감의 행위에 대해 성희롱이 아니라 '술자리 예의'로 봐야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피고인 여성부 남녀차별위원회 변호를 맡은 이명숙 변호사는 이처럼 개탄했다.
이 변호사는 27일 오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모든 선생님들을 향해 '교장선생님께 술을 따라 드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맞지 여자를 지목해서, 그것도 '나이 어린' 여교사를 지목해서 술을 따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성희롱"이라며 "재판부가 여전히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난했다.
이 변호사는 "우리 전통의 미풍양속은 '딸이 아버지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술을 따르는 것이지 '외간 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것이 미풍양속이었나"라고 반문하면서 "법원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인 나로서는. 재판부이건 이명숙
변호사의 의견이건 간에 여기 나오는 미풍양속에 모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아. 자기가
술 따라주고 싶은 사람에게 술 따라주는 거지 뭐 남편과 아버지에게만 순종하듯
술을 따르는 것 역시 여성을 속박하는 인습 아닐까. 그런데, 저런 술자리문화가
한국 사회에 만연함을 알고 난다면 나이들 남자 상사에게 술을 '따라 드리기는'
싫다.
저번에 체벌을 반대한다는 긴 글에서 말했던 거 기억나? "학생을 자신의 판단대로(결국 마음대로) 때릴 수 있고,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교사가 진정으로 학생을 인격체로서 존중할 수 있겠느냐" 고 했었지. 마찬가지다. 직장에서는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부하직원, 회식 자리에서는 내게 술을 따라주는 것이 당연한 젊은 여성.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성이 거래되는 음주문화'. 이런 상황에서 정녕 그 부하여직원이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일까, 신뢰할 수 있는 의젓한 직장 동료로 보일까? 그런 게 가능한걸까?
무엇보다도 '가해자 측이 아무런 악의가
없다 해도 피해자가 모욕을 느꼈다면 마땅히 가해자가 사과해야 함' 이 기본
전제라는 걸 생각해보자. 저 상황에서의 여성에게 무슨 생각이 들까? 자신을 직장동료로
보지 않고 '술을 따르는 여성' 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 이건 성폭력이야.
꼭 몸만 만지고, 음란한 농담하는 게 다가 아니야. 그리고 이 사건에서의
고등법원 재판부도 이런 문화적 맥락을 싹 무시한 채 판결을 내렸으니 문제라는
거지.
먹고 살기 위해 술을 따라야 하는 여성, 너 나 우리들
많은 어머니들은 자신의 딸이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직장
생활' 이 가능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실상을 보면 사립학교 여교사들은 공립학교에 비해
고용상태가 불안정한 경우도 많고, 남자 상사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없을
수가 없지. 이 사건에서의 피해 여교사도 마찬가지일거야. 게다가 사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오기까지는 여간 독한 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온갖 눈초리가 뒤따랐겠지.
아직도, 한국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사회는 되지 못했구나. 그나마 이런 권위주의적 사회에 도전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걸로 약간이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까.
얼마전 한 고등학생 분이 '성교육의 날' 을 제정하고 제대로 된 성교육을 시행하자는 교육청 앞 1인 시위를 하셨다는 소식을 접했어. 그래, 성교육은 정말 시급한 문제지. 그런데, 부끄럽게도 성인의 성문화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이 '요즘 애들은 참~' 이라고 탄식한다거나, '어차피 알 거 다 아는데'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지난번에 다른 글에도 썼었지만, 성인문화를 고치지 않고서 무슨 청소년 문화를 논할 수 있겠니. 게다가 성문제는 일차적인 '성관계' 의 문제만이 있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양성차별과 맞닿아 있지. 내가 그랬어.여성주의적인 시각을(지금도 키우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가지면, 그동안 지나쳐왔던 수많은 사회의 문제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단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금씩 좋아진다고 믿어. 우리,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하자. 어렵지 않아. 상대방과 내가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말야.
오마이뉴스 기사 "여자가 술 따르는 게 아직도 미풍양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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