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판타스틱스> 의 영문 가사를 참고하여 쓴 것입니다.
달빛 동화
2005.1.13 씨어터일
왜 여러분은 공연장에 가는 걸 좋아하세요? 여러가지 답이 나오겠지만, 전 관객들이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환상' 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대에서 영화나 드라마 만큼의 사실적인 공간의 묘사는 불가능하지만, 극이 시작되고 배우들의 연기와 스탭들의 연출이 맞물리면서부터는 그 텅 비었던 무대가객석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거듭나기 때문이지요. 꼭 놀랄만한 특수효과나 반전이 없더라도 말이에요. 희극이냐 비극이냐를 떠나서, 그러고보면 모든 무대예술은 '환상예찬' 이라는 공통된 마인드로 커튼콜을 거듭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판타스틱스> 의 경우는 좀 더 독특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무대 위의 환상은, 관객과 직접 만나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환상 속의 환상' 이라고 해야 맞거든요. 한 번 걸러져서 보여지는 이 이야기의 서술자이자 총 지휘자는 바로 "엘가로(EL GALLO, 조승룡)" 입니다. 엘가로가 말하는대로 다른 캐릭터들은 형성되고, 행동하게 되는거죠. 자! 엘가로의 동화책을 함께 펼쳐볼까요?

(공연 스틸 사진 출처 : 대학내일)
돌이켜보세요, 지나간 9월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못말리는 공주병환자 루이자(LUISA, 김희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친구 마트(MATT, 최재웅)는 똑같이 '금지된 사랑에 대한 환상' 을 꿈꿉니다. 자기네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인양 벽 너머로 얼굴만 내밀고 속삭이다가도 두 아버지에게는 딱 잡아떼죠? 하지만 두 사람의 아버지 벨로미(BELLOMY,한성식)와 허클비(HUCKLEBEE,권유진)는 오히려 아이들의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심리' 를 역이용해서 서로 사돈지간이 되려고 지금까지 '사이 나쁜 이웃사촌' 인 척 했던거죠.
근데 돌이켜볼까요. 벨로미와 허클비는 이 '금지된 연애' 의 피날레를 위해서 엘가로를 끌어들여서 '겁탈극(!)' 을 준비하죠? 아예 아이들이 가진 공주와 왕자의 환상(공주가 위험에 처하면 왕자가 구출해줘서 둘이 잘 살았대더라~하는!) 마저도 실현시켜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보는 우리들로서는 그냥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헨리(HENRY, 서현철)와 머티머(MORTIMER,이현철)만 해도 그래요. 작은 역할만 있을 뿐 작은 배우는 없다? 아니 그렇게 멋들어진 연기철학을 가진 인디언 전문 연기 배우가 왜 그렇게 우스꽝스럽냐구요. 맞아요, 사실 환상이라는 거, 참 우습고 웃기는 거죠. 마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엘가로와 헨리와 머티머가 연기하는 코미디는 정말 가관입니다.
환상만들기, 환상부수기
이러다보니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에도 뭔가 좀 어정쩡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어서 포즈를 잡은 네 사람이지만 한쪽 다리를 들고 선 아버지들의 후들거리는 자세는 상당히 안쓰럽지요^^;;1막에서 절정에 다다랐던 주인공들의 '환상만들기' 는 이제 2막부터 삐거덕 거리기 시작합니다. 벌써 루이자만 봐도, 막상 눈앞에 놓인 연인 대신 엘가로의 환상을 쫓게 되구요, 마트는 어떻죠? 아버지들의 계략(?)에 의해서 사랑이 키워진 것을 알고는 아까까지의 왕자스러운 태도 대신 '바깥세상' 으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니까요.
이들의 환상을 현실로 이루어준사람도, 그 현실을 다시 깨뜨린 사람도 모두 엘가로입니다. 전체적인 스토리가 엘가로의 나레이팅에 따라 흘러가고, 각 캐릭터들의 색깔은 오로지 본인들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단순하게 그려진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전개죠. 왜 엘가로가 마트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지 의아하셨다구요? 그게 원래 엘가로의 역할인걸요. 엘가로는 판타스틱스에서 유일하게 뭐든지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캐릭터입니다(심지어 '가짜 달' 까지!) 어리고 철없는 두 연인에게 서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 그로써 둘 모두 성숙하게 만들려는 게두 원작자(극작 Tom Jones, 작곡Harvey L. Schmidt)가 엘가로에게 부탁한 임무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떨어진 뒤에 겪는 일련의 과정들에 역시 엘가로가 모두 개입합니다. 마트가 찾아간 도시에 제일 먼저 나타난 껄렁껄렁 날라리는 엘가로가 고용한 바로 '그들'이었고, 루이자에게 새로운 사랑처럼 보이는 엘가로는 '환상을 훔치는 악당' 답게, 루이자의 눈에 진실 대신 환상만 보이도록 가면을 씌우죠. 물론 이 과정에서 전개가약간 매끄럽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관객들의 후기 중에 '전체적으로는 아주 즐거웠는데 2막보다는 1막이 더 신나고, 루이자와 마트가 방황하는 부분이 좀 지루하더라' 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먼저 환상이 깨지고 갈등이 드러나는 순간의 특성상 그전처럼 유머러스 하기는 어려운데다, 서로를 떠나 방황하는 과정에서의 두 사람의 캐릭터가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아서 그랬던 걸거예요. 사실 18살과 20살(더구나 마트는 대학생!)인데 얘네는 너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 같이 굴죠. 그래도 마트같은 경우는 큰 도시에서 험한 일들을 겪으며 내 곁에있었던연인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루이자같은 경우는 끊임없이 환상을 쫓다가 엘가로에게 버림받고 다시 마트를 사랑하는 걸 깨닫게 되는 과정이 너무 빨리 전개되는 바람에 감정이입이 좀 힘들어집니다. 이 작품이 1959년에 초연된 것을 감안하면(원작자 톰 존스와 하비 슈미트는 한국전쟁 참전군인이었는데, 전쟁 중에 서신을 교환하며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현대적으로 "업데이트" 가 안 된 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신기하죠? 뻔히 예정된 결말인데도 <판타스틱스> 는 관객에게 행복을 줄 줄 아는 뮤지컬이라는 걸 제대로 각인시킵니다. 그동안 꿈꿔오던 환상(루이자가 가지고 있던 엄마의 목걸이)은 비록 엘가로에게 도둑맞았지만, 루이자가 다시 마트와 함께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내 님이여' 를 다시 부를때 덩달아 흐뭇해지거든요.
신비하여라, 사랑 My mystery Of love
<판타스틱스>는 사실 골치아프게 따져가며 볼 필요가 전혀 없는 쉬운 내용으로 짜여 있습니다. 이렇게 관객친화력이 높은데다 말 그대로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가 흐르는 '판타스틱스' 의 매력이야말로 이 공연이 기네스북에 오른 최장기 뮤지컬일 수 있는 까닭 아닐까요. 물론 익살스러운 두 아버지와 두 배우들, 그리고 미워할 수 없
는 환상 전문 악당 엘가로 역시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즐거운 '환상'으로 관객들의 기억속에 남아있겠죠?
아하! 중요한 얘길 빠뜨릴 뻔 했군요. 이 작은 <판타스틱스>가 큰 공연에서의 수십명의 앙상블이 부럽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뮤트(MUTE, 조승연)덕택입니다. 짖궂은 엘가로와 달리 시종일관 모든 등장인물을 향해 따스하게 미소짓는 "벽"의 경쾌한 마임으로 인해 공간이 바뀌고, 헨리와 머티머가 등장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 루이자와 마트의 머리 위로 고운 색종이들이 뿌려집니다. 주인공들은 환상 대신 추억을 얻었지만, 관객들은 그 추억 말고도 달콤한 달빛을 타고 흐르는 환상도 함께 가져가게 되었네요. 오~ 엘가~로씨! (발음 주의!) 멋진걸요!
PS-1 이럴수가, <판타스틱스> OST 는 국내에서는 절판되었다.....그러나 온라인을 통해 영어버전 판타스틱스 OST를 득템했답니다 :)
PS-2 재치있는 번역 ~ Love! You are love! Better far than a metaphor Can ever, ever be. 는 '오 내사랑,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내 님이여' 로 후렴구 They were you는 '너는 꿈, 너는 빛, 너는 나' 로 개사되었으며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게 리듬과 조화를 이룬다. 역시 '제 2의 창작' 인 번역에서는 '이 문장을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까' 가 아니라 '원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한국어를 쓴다면 어떤 단어를 선택했을까' 의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니 원작자 못지 않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수겠지.....
PS-3 꾸준히 이어지는 프로포즈 이벤트. 선택받은 커플에게는 이보다 더 축복일 수 없지만 솔로부대에게는 치명적이다.
PS-4 뮤트의 노래가 듣고 싶었는데, 앵콜이 없어서 아쉽다. 그러나 다른 배우들의 고운 목소리와 3인조 밴드의 경쾌한 연주는 정말 깔끔하고 예뻤다.
PS-5 평일에 찾아간 씨어터일. 나,다 열은 전석 매진이고 가, 라 열은 텅텅 비었다. 무대와 정면으로 보는 좌석이 아닌 측면의 가, 라열. 관객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듯. 설마 전부 사석(死席)화 되는 건 아니겠지.
다열 앞자리 관객들은 얼떨결에 엘가로와 악수했고, 난 벨로미한테 물뿌리개로 물 받아 마시다가^-^ 허클비한테못생긴 채소로 몰릴 뻔 했다 ㅜ_ㅜ 앞자리의 묘미란!
PS-6 이 작품부터, 저는 더 이상 공연을 본 뒤 대본을 참고해가면서 리뷰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렌트같이 까다로운 작품은, 영화처럼 수시로 돌려볼 수 있는 노화물이 아니기때문에 대본을 보고서라도 샅샅이 훓어야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저작권을 이유로 대본을 비롯한 공연 제작 관련 자료를 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기억력을 보강하면서 리뷰를 써버릇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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